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다. 일상 체계가 무너지고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성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성폭력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 대도시 빈곤층의 여성과 어린이에게도 삶은 이러한 전쟁터와 다를 바 없다. 멕시코시티에서 증가하고 있는 성폭력 문제를 다룬 <제비꽃 향기: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대도시 빈곤층 여성의 위태로운 삶을 신랄하게 드러낸다. 마리사 시스타치 감독은 절친했던 두 사춘기 소녀의 삶이 끔찍한 강간으로 인해 산산조각 난 실화를 바탕으로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었다.
 열다섯 살 중학생 소녀 예시카는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호기심이 많고 반항적이기도 하다. 단짝 친구인 미리암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내아이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톰보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어린 동생들을 맡아 돌보고 온갖 집안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시카가 거부하는 한 가지 일은 의붓오빠의 뒤치다꺼리이다. 버스 차장으로 일하는 의붓오빠는 운동화 한 켤레를 마련할 욕심에 동료 운전사가 예시카를 강간하도록 도와 준다. 예시카는 끔직한 강간을 당하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가족도 학교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의 공포에 시달리는 그녀가 기댈 사람은 단짝 친구인 미리암뿐이다. 미리암의 사랑과 이해는 예시카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예시카는 미리암이 풍기는 제비꽃 향기를 사랑한다. 자신의 냄새에 묻어나는 빈곤과 소외에서 상상적으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암의 집안도 어머니 혼자 빈한한 생계를 꾸려 가지만 어머니가 미리암에게 쏟는 애정은 남다르다. 미리암의 어머니도 예시카를 반길 리 없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 주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예시카는 자신의 몸에서 강간의 체취를 위장하기 위해 상점에서 제비꽃 향수를 훔치게 되고 이 때문에 같이 있던 미리암도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우정과 배반, 억압과 반항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성폭력의 사회적•제도적 요인들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다가가는 솜씨가 놀랍다. 강간의 장면을 노골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센세이셜니즘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그 장면을 즐기게까지 하는 여느 영화들과는 달리, 강간의 행위는 노출하지 않으면서 당사자에게 이러한 행위가 끼치는 영향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접근도 높이 살 만하다. 치밀하게 설계된 각본, 독특한 색채와 자연스러운 촬영, 적시에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는 음악, 꼭 보여 줄 것만을 보여 주는 경제적인 편집이 어우러져 관객의 뇌리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남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