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아스 라인>로 통쾌한 여성주의 공동체의 비전을 보여 주었던 마린 고리스 감독의 신작. 이번에는 셜리 맥클레인, 줄리아 스타일스 등 할리우드의 쟁쟁한 연기자들과 함께 작업했다. 사랑과 결혼을 향해 나아가는 젊고 아름다운 여남의 이야기는 상큼한 할리우드 로맨스 장르의 관습을 따르고 있지만, 고리스 감독 특유의 여성주의적 비전이 가부장적 규율이 통치하는 할리우드 제국에 역습을 가한다.
 캐롤라이나 미라보는 20대 초반의 젊고 아름다운 독신 여성. 독신의 할머니 밑에서 할머니 못지않게 남다른 두 여동생과 함께 성장했다. 이들은 떠돌이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이따금 술에 취해 나타나 바구니에 담긴 갓난 동생을 선사하고 사라질 때마다 늘어난 가족이다. 출생지만큼이나 다양한 어머니들을 둔 이 가족은 부계 중심의 일부일처제와는 거리가 멀다. 캐롤라이나는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결코 자신이 이러한 대안가족의 전통을 승계할 생각은 없다. 캐롤라이나는 혼자 대도시로 나와 방송국에서 일하며 살아가면서 ‘정상적인’ 결혼을 꿈꾼다. 옆집에 사는 청년 알버트는 서로 고민을 나누고 힘이 되는 단짝친구. 어떤 여성의 가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써서 살아가는 작가이기도 하다. 완벽한 남성을 기다리던 캐롤라이나 앞에 드디어 부와 명예를 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고, 이러한 경험은 캐롤라이나와 알버트 사이에 흐르던 우정의 물길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영화의 숨은 주인공은 단연 할머니. 할머니는 자율과 지혜, 서로에 대한 배려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여성적 세계를 향한 고리스 감독의 비전을 읽을 수 있는 인물이다. 가족 잔치가 펼쳐지는 할머니 집의 뒷마당은 이러한 여성주의적 비전이 구현되는 마술적인 공간. (남인영)